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서평과 독서에세이 사이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주눈꽃 2020. 10. 2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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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서 연애소설,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필활동을 펼치는 에쿠니 카오리의 신작소설. 사랑하는 남자를 15개월에 걸쳐 서서히 떠나보내는 여자, 리카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8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애인 다케오가 어느날 갑자기 이별을 선언한다. 이유는 하나코라는 여자 때문. 누구나 그녀를 사랑하지만 하나코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스스로도 소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녀는 다른 사랑을 파괴하면서까지 사랑을 이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는데……. 에쿠니 가오리가 담아내는 실연에 관한 새로운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나는 소설을 가끔 즐겨 읽는데 그 중에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일부러 정한 것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 책은 이상하게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많았던 것 같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녀의 소설은 무언가 다르다.

그녀의 소설의 내용이나 어떤 것들 보다도 책 속에 또박또박 활자로 찍혀 있는 그 간결하고 무미건조한 문체가 꽤 맘에 든다.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가 주목 받을 때 쯤 여작가와 남작가가 따로 쓴 소설이라고 하기에 읽어봤는데 그 때는 그 문체가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때는 소설에 감정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나중에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짧은 호흡. 독백하듯이 뚝뚝 떨어지는 글자들이.

 

 

책의 내용을 말하자면.

꽤 오랫동안 사귀어 왔고 함께 살던 연인인 리카와 다케오.

다케오는 다른 여자가 좋아졌다며 함께 살던 집을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 다케오가 좋아하는 여자인 하나코와 함께 살게 된다.

함께 했던 시간이 긴 만큼 그를 잊어가는 일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전해오는 소설.

홀로 잊어가는 과정을 그렸음에도 슬프지도 않고 다케오를 미워하는 마음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그저 잔잔하게 무덤덤한 분위기로 서술되어 있지만 읽는 사람은 심장 떨리듯이 미세하게 파도치는 감정을 느낀다.

 

함축된 느낌, 짧은 문체로 감정을 담는 일은 어렵다.

너무 긴글은 읽고 이해하면서 감정마저 흘러가버린다.

그래서 에쿠니 가오리 소설은 한 구절 짧은 글귀를 곱씹을 때마다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한마디 한마디에도 어떠한 감정이든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한권을 읽어도 좋아하는 글귀가 몇 군데씩 나오는 건

역시 그녀의 문체가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고, 술도 안마셨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수다도 떨지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하나라도 하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 낙하하는 저녁 中.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글귀.)

 

 

 

 

2015.07.03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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