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서평과 독서에세이 사이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주눈꽃 2020. 11. 3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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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집

 

  • 그러니까 결국 은영이 보는 것은 일종의 엑토플라즘,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다. 미색 젤리 같은 응집체는 종류와 생성 시기에 따라 점성이 달랐다. 죽은 것들은 의외로 잘 뭉치지 않는다. 산 것들이 문제다.

  • 장난감 칼과 총에 은영 본인의 기운을 입히면 젤리 덩어리와 싸울 수 있었다. 비비탄 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사용 가능하다.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터키의 이블 아이, 바티칸의 묵주와 부석사의 염주, 교토 신사의 건강 부적을 더하면 스물여덟 발, 19분까지 늘일 수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삶은 이토록 토테미즘적이다.

  • 은영은 참치란 말에 침이 꼴깍, 넘어갔으나 제자를 우선시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차분히 거절했다. 인표의 얼굴에 ‘웬일이야, 저 여자가 참치를 거절하고.’라는 자막이 지나가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얼굴로 말하는 남자 같으니라고.

  • 「레이디버그 레이디」라는 그 노래는 품에 안고 있던 연인을 앰뷸런스에 실어 보냈더니 흰 셔츠에 피와 흙이 묻어 무당벌레 무늬가 생겼네, 하는 비장한 내용을 엇박자의 경쾌한 리듬에 실어 언밸런스가 두드러지는 희한한 노래였다.

  •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 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 강선이 은영의 조그만 창가로 올라앉았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잠시 가렸다. 마디가 사라진 손가락들이 곧았다. —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나선 금방이었다.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은 어째서 시대가 바뀌어도 이렇게 늘 재미가 없을까. 교장 선생님 대상으로 누군가 재미있게 말하기 연수 프로그램을 좀 짜든가, 그도 아니면 짧게 말하기라도 하도록 방침이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은영은 투덜거렸다. 어쩌면 웬만해선 재미있는 사람들이 교장이 못 되는 건지도 모른다. 드물긴 해도 어딘가에는 분명 재밌는 교장 선생님이 있는 학교가 있을 텐데 다음번에 취직할 때는 알아보고 해야겠다, 그런 얘기를 얼핏 했더니 인표가 “우리 집안 아저씨예요. 까지 마세요.” 해서 뜨악했더랬다. 좋지도 않은 학교 뭐라고 족벌 경영이냐,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디저트를 먹었다

  •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 은영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모진 의도가 없었다 해도, 머물지 않겠다는 그 표정만으로 지난 몇 년간 인표는 신경통 비슷한 것을 앓아야 했다.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관계라면 놓아야 하는 관계겠지. 그런 말 그대로 기운 뺏기는 관계는.

  • 다 살아온 경험이 있어서 말하는 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라, 별거 아닌 걸로 거짓말하는 사람들한테는 꼭 다른 꿍꿍이가 있어.

  •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 그 어둠 속에서 인표는 자기 눈도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잠든 은영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약간 빛이 어려 있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정말로 빛이 나는 건 아닐 텐데 잠든 은영의 손을 잡아 주거나 가볍게 안아 주면 은은하게 발광했다. 인표는 그 사실을 은영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저 충전이 잘된 날, 완전히 차오른 은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잠드는 게 좋았다. 그 빛나는 얼굴이 인표의 수면등이었다.

  •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생각수집

뒤에 작가의 말을 보면 첫 문장에서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고 쓰여 있다. 글쓰는 삶을 살고 싶은 독자로서 그 말은 참 매력적이었다. 소설 책 한 권을 쓰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쿨하고 멋져 보였다. 소설 또한 그만큼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젤리같은 어떤 형체를 뿜어내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젤리들에 영향을 받고 실수하고 사고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는 안은영 같은 존재들.

 

그런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지구에서 한아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호기심을 끄는 소재라 읽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 책보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먼저 읽게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보기 전에 원작을 읽고 싶은 마음에 먼저 읽게 됐지만, 후루룩 읽히는 이 소설은 다음 <지구에서 한아뿐>을 구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면 보통 원작을 먼저 보고 드라마나 영화를 감상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게 보면 책을 읽으면서 보며 상상해왔던 것을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해 냈는지 보는 재미도 있고, 원작과 달라진 부분이 있으면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소설은 보건교사 안은영과 그 학교 이사장의 손자인 한문교사인 홍인표와 함께 그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설 속 챕터별로 인물이 등장하고 두 교사가 해결하는 방식이다. 옴니버스 형식처럼 계속 다른 인물이 나오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시즌제로 만들어지는 데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시즌1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오리선생이나 귀신을 본다는 학생의 어머니 등의 이야기는 다음 시즌2에서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한다.

 

넥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경미 감독님의 느낌이 잘 살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미쓰 홍당무> 느낌이 조금 났다고 해야하나? 상황과 대사들이 있고 난 후에 잠깐의 정적 같은 시간들이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잠깐의 순간동안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한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있을까.

 

책을 읽을 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영상 속 안은영은 조금 더 촌스러워 보였지만, 정유미라서 그것 마저도 잘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차고 입이 걸은 안은영과 대비되는 귀여운 무기들의 조합은 신선했다.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알이 든 장난감 총은 생각보다 예뻐서 굿즈로 나오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영상 속 젤리는 책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엽게 만들어졌지만, 옴은 좀 징그럽게 느껴졌다. 벌레를 싫어해서 그런지 발이 달린 옴이 나오는 장면마다 조금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옴을 제거하는 역할을 했던 학생 또한 입에 자꾸 넣을 때마다 보기에 징그럽고 안쓰러웠다. 그 옴들이 떼거지로 나올 때는 정말...... 영상을 끄고 싶었다. 앞으로 '재수 옴 붙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내 몸에 붙은 그 벌레가 생각이 나서 왠지 소름이 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설마 그걸 의도한 걸까 싶기도 했다.

 

귀신이나 징그럽게 생긴 괴물이 아니라 젤리들을 해치우는 보건교사. 하는 일만 보면 히어로 같지만 무기를 보면 장난 같은 느낌이다. 위험하지만 하나도 진지하지 않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물리치는 토테미즘적인 인생이 너무 처절하거나 진지하지 않아서 난 좋았다. 그 옆에는 보호막 빵빵한 홍인표도 있었고.

책도 재밌었지만, 넷플릭스로 보게 될 시즌2도 기대가 된다.

 


 

 

이 포스팅은 직접 제 돈 주고 구매한 책을 읽고 쓰는 솔직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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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장편소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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