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일상에세이

[나를 찾는 글쓰기] 에세이 #3. 엎는 날

주눈꽃 2020. 10. 12. 11:19
728x90

엎는 날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내내 집중이 잘 되지 않아 힘들었던 시간을 보낸 날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와서 밀린 빨래를 돌리면서 세탁기 위에 올려두었던 세제통을 보게 되었다. 

 

코엑스에서 사온 다우니 통이 대용량이라 평소에 사용하기 편하도록 작은 소분용 통에 나눠 담아두는데, 거의 비어 있길래 새로 담았다. 

 

큰 통을 들어 작은 통에 부은 후, 옆에 놓아두려는 찰나에 들고 있던 큰 통이 금방 담아둔 소분용 통을 툭 쳐 버린 것이다. 

 

둘 다 뚜껑이 닫혀있지 않은 상태여서 금방 애써 담은 내용물이 왈칵 엎질러졌다. 

 

입구가 넓은 통이었는데 새로 담자마자 빈 통이 되어 버렸다.

 


엎질러진 섬유유연제는 세탁기 위에서부터 세탁기 바로 옆에 있던 창틀까지 점령하고 그 사이의 벽을 타고 내려와 세탁실 바닥까지 다우니 범벅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휴대폰까지 덮쳐 멍하던 찰나에 정신줄을 잡고 잽싸게 휴대폰부터 얼른 건져서 닦았다. 

 

창틀과 세탁기 밑에 바닥까지 흘러내리는 짙은 하늘색의 섬유유연제를 닦아 내느라 힘들었다. 

 

닦아도 자꾸만 미끈미끈한 촉감에 불쾌했고, 고농축된 향기에 정신이 아찔했다. 

 

세탁기와 벽 사이, 그리고 세탁기 밑에 바닥 부분은 안쪽까지 손이 닳지 않아 깔끔하게 닦지 못해서 짜증이 났고, 엎질러버린 다우니 한 통이 아까우면서도 '조금 더 조심 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며 후회하는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집에서 혼자 정리하다 그런 거라 누구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사고 친 걸 수습하는 것도 나 혼자 해야 하니 얼른 정리하고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좁은 세탁실을 빠져 나오고 싶었다.

 

 

정리를 끝내고 거실로 나왔더니 눈앞에 보인 식탁에 쌓인 물건들. 며칠 동안 정리한다고 다 버리겠다고 했던 물건들을 쌓아두었던 것들이었다. 

 

치우기 시작하면 이렇게 ‘치워야 할 곳’이 눈에 거슬려서 식탁 위도 정리하기 시작했고, 정리하던 중 이쑤시개 통을 엎질렀다. 

 

나도 모르게 ‘앗!’ 소리가 나왔다. 식탁 밑으로 떨어진 플라스틱 통이 열리며 이쑤시개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재빠르게 막아보려 그 통을 잡으려 따라갔던 내 손끝에서 이미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담으려 허리를 숙였을 때 다시 욱한 성질이 비집고 나왔다.

 



이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 되는 것 같은 날.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것들이 괜히 서럽게 만든다. 

 

시작한 정리는 안방에 들어가 이불 커버까지 바꾸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아무 사고 없이 이불 커버를 잘 바꾸고 나서야 기분이 한 결 나아져서 책상 앞에 앉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하느냐고. 

 

별일 없냐고. 

 

내 속을 아는 듯 전화한 엄마에게 난 이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하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떨리는 듯 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오늘은 엎는 날이구만!'이라고 말했다. 

 

화나고 짜증났던 순간들을 그냥 엎는 날이라고 단정 짓는 그 순간 그냥 ‘오늘은 이런 날이구나.’ 하면서 웃어넘기게 되었다. 

 

특별하지 않지만, 감정으로 내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나를 편하게 해주는 한 마디였다.



(원고지 8.1장)

2016.10.15 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