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음주에세이 <술못하는 애주가>

음주에세이 <술 못하는 애주가> 언니 좀 노셨나봐요?

주눈꽃 2020. 11. 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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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좀 노셨나봐요?

 

첫 회사의 신입 시절.

팀끼리 소박하게 회식을 하고 주임님 차를 타고 기숙사에 돌아가던 길이었다.

기숙사에 살진 않았지만

그날 많이 취해서 데려다주려고 H선배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이미 그녀는 늘어진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어느 동네인지는 들었지만 그 동네 아파트가 어딘지 몰랐던 우리.

먼저 내려주고 가야해서 급한 마음에

정신 못 차리는 H선배를 붙잡고 흔들며 깨우기 시작했다.

 

나 : 선배님, 집이 어디에요? 어디 아파트에요?

H선배 : ...

나 : 선배님~ 일어나봐요~

H선배 : ...

 

그렇게 대답 없는 그녀를 붙잡고 실랑이를 하다

마침 그녀의 휴대폰의 존재를 깨달았다.

숙녀의 가방을 뒤지는 것은 실례지만,

일단 집에는 보내야겠기에 옷이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뒤져서 휴대폰을 찾았고

결국 어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H선배네 집 앞.

팀원들이 모두 내려서 깨워보았지만

아예 뒷좌석을 안방처럼 편하게 드러누워 잠투정까지 선보이던 그녀.

당신 그 팀의 막내였던 내가 그래도 궂은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를 과감히 흔들어 깨워서 겨우겨우 일어나 앉혔다.

그렇게 부축해서 차에서 내리려는 데

갑자기 “퉤!” 침을 뱉었다.

 

응?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 순간 ‘크아아악 퉤!’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같이 부축을 도우려고 옆에 서 있던

E선배 마저 놀라서 H선배의 팔을 탁! 때리며

 

E선배: 야, 미쳤나봐~! 왜 침을 뱉고 난리야!! 얘 내일 어떡하려고 그래 정말!

(나를 보며) 괜찮아?

나 : 아, 네네~ 괜찮아요. 많이 뱉은 것도 아니고~ 술 취해서 그럴 수도 있죠.

 

다음 날 출근하니 H선배가 술 취해서 나한테 침 뱉었다고 소문이 다 났더라.

H선배는 출근하자마자 그 얘기 듣고 기겁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H선배 : 미안해~~ 야, 내가 진짜 그랬어? 나 진짜 기억 하나도 안나~

나 : 괜찮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는데, 우리는 어이없게도 이때부터 친해지게 됐다.

처음엔 새로 온 신입이 낯설어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던 H선배는

그 날 이후로 내게 미안한 마음에 밥 사주고, 술 사주며 살갑게 대하더니

우리는 어느새 비밀 없는 술친구가 되었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잘 지내고 있는지 연락을 자주 못해서 조금 멀어졌지만

나의 주생(酒生)에서는 가장 지분 많은 나의 술친구이다.

 

선배님, 술 마시면 기억 안 나던 것도 술 마시면 다시 기억나는 경우도 있다던데

전에 나한테 술 먹고 침 뱉은 거 기억나세요?

나 그땐 쿨하게 괜찮다고 사람 좋게 웃으며 넘어갔지만

사실 속으로는 노는 언니인 줄 알고 쫄아서 그랬어요~

괜찮다고 안하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농담)

그나저나 여전히 그렇게 마시고 다니는 거 아니죠?

 

 

 

2018.01.19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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