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음주에세이 <술못하는 애주가>

음주에세이 <술 못하는 애주가> 분위기 잡기가 이렇게나 힘든 겁니다.

주눈꽃 2020. 11. 1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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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잡기가 이렇게나 힘든 겁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선선한 날씨는 여행가기 딱 좋다. 그맘 때쯤 나도 친구와 휴가를 맞춰 부산여행을 가게 되었다. 부산은 난생 처음이라 설레었다. 친구와 카페에서 부산 여행 책자를 보면서 동선도 짜보면서 참 열심히 여행계획을 세웠다. 계획대로 다니지는 못했지만.

소박하지만 깔끔해보이는 호텔도 미리 예약을 해 두었다. 체크인 했을 때 방이 좀 작기는 했지만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침대 옆에 큰 창이 있었는데 바다가 보이진 않았지만, 야경이 예뻤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온 주택들이 모여 예쁜 야경을 이루는 동네였다. 낮에는 내내 돌아다니며 지쳐서 들어와서는 씻고 창밖의 그 야경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그 큰 창은 살짝 바깥쪽으로 튀어나와있어서 창틀 부분에 물건을 올려두기 좋았는데, 순간 스치는 생각.

나 : 야. 이 창문 앞에서 와인 마시면 완전 분위기 좋겠는데?
친구 : 와, 진짜 그러네. 와인 사가지고 와서 한 번 먹자~
나 : 그러면 여행 마지막 날, 콜?
친구 : 콜!

겁이 많은 친구는 내가 술 취해서 낯선 곳에서 길을 잃으면 안된다며 술을 많이 못 마시게 했는데, 숙소에서 마시자고 하니까 냉큼 좋다고 했다. 먹고 바로 자면 되니까 안심이 되었던 모양. 게다가 친구도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솔깃해했다.

그렇게 여행 내내 와인을 살 만한 곳을 찾았지만, 여행 루트 상 찾을 수 없었고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 날 광안리에 가던 길에 큰 쇼핑몰 쪽에서 적당한 와인을 찾아서 골랐다. 저녁에 멋지게 여행을 마무리할 생각에 우리는 설레었다.

그 기쁜 마음도 잠시, 우리는 분위기 좋은 저녁시간을 위해 하루 종일 그 와인 병을 들고 다녀야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에 와인을 들고 다니는 여자. 차가 없이 여행을 하는 터라 광안리 인근 곳곳을 대낮부터 와인과 함께 했다. 저녁에 들어가며 구입하려 했지만, 여행지라 잘 모르니까 보자마자 구입하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들고 다녔던 와인과 함께 무사히 호텔로 귀가했지만 우리는 또 한번 멘붕에 빠지게 된다. 잔이야 객실 내에 있는 유리컵으로 대신 한다 쳐도, 생각해보니 오프너가 없지 않은가? 데스크에 내려가 부탁해보고 했지만, 오프너를 구할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니 직원분이 식당쪽에서 젓가락을 하나 빌려다 주셨다. 코르크를 젓가락으로 찔러서 밀어 넣은 뒤에야 우리는 겨우 와인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산전수전을 겪어 세팅해둔 안주와 와인은 사진으로 멋지게 남겼지만, 아무도 그 비하인드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다.

아니, 이렇게 분위기 잡는게 어려울 일인가? SNS에서 보는 그런 멋진 장면과 사진은 다 이렇게 힘들게 연출된 거였나 싶다.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를 직접 체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행 중에 마신 와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텐데. 처음 와인을 생각했을 때의 ‘우아한 매력과 분위기’보다는 그때의 그 분위기를 갈구하던 20대 여자사람들의 ‘험난했던 준비 과정’이 더 기억에 남아서 허탈한 웃음이 난다. 이제는 그렇게까지 와인을 마시자니 그냥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 마시고 싶다. 뷰가 좋은 숙소에서 여행 중에 와인 한 잔을 하려거든, 오프너를 꼭 챙겨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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