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낭독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처음 술을 마시고 취한 어느 날을 되돌아 보라. 이왕이면 많이 취해서 실수한 날 중에 가장 처음이라고 생각되는 그 날이라면 좋겠다. 그때 당신의 술버릇은 무엇이었나?
나도 내가 취해서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예상치 못한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참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날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던 것 같은데...물론, 정확하지는 않다. 취해 있었으므로. 여러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 분위기에 잘 취하는 경향이 있어 한껏 흥이 올라 있었다.
스무 살 쯤 중학교때 친구들과 동창회 비스무리하게 모인 적이 있었다. 헤어진지 얼마 되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땐 왜 그렇게 어른들의 동창회처럼 하고 싶었는지, 주최하는 친구가 있어 그 핑계로 슬며시 참석했다. 한창 잘 먹고 클 나이(?)라 고기뷔페로 1차, 그리고 2차로 술집에 갔고 술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스무살 배기들은 다들 눈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장난기가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취한 것 같은 친구들을 찾아 만취테스트를 하고는 “야, 얘 취했다~ 집에 보내라~” 큰 소리로 만취를 공표해주곤 했다. 술 취한 친구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을테지. 하지만 난 그때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서 그랬던건지, 술 기운에 흥이 나서 그랬던 건지 더 놀고 싶었다. 절대 ‘술취한 자’로 찍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가에 나에게 ‘너 취했지?’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안 취했다고 말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그 녀석이 큰 소리로 떠들기 전에 어떻게든 내가 멀쩡한 정신이라는 걸 인정받아야 했다.
나: 야, 나 진짜 안 취했어! 봐봐! 와우노래방, 한..림서점. 사랑방. 삼겹살 2800원.. 어? 봐바! 나 정신 멀쩡하다니까~ 아 진짜야~
그렇게 한 동안 징그럽게 길거리에 있던 간판을 죄다 읽기 시작했다. 술 안 취했다고 증명하려 한 거였는데, 그 시절의 친구들에게 나는 ‘술취하면 간판읽으면서 안 취했다고 우기는 애’로 낙인 찍혔다.
그렇게 나는 스무 살에 취중 길거리 간판낭독회를 열게 되었다. 누군가는 고상하게 시낭송을 하겠지만. 뭐 어떠냐. 무엇을 읽든 더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의 의미만 전달되면 되는거 아닌가. 나의 간판낭독 속에 함축적인 의미는 ‘너희와 더 놀고 싶어, 헤어지기 싫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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