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에세이가 된다면/음주에세이 <술못하는 애주가>

음주에세이 <술 못하는 애주가> 건배를 피하고 싶었어.

주눈꽃 2020. 11. 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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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를 피하고 싶었어.

 

회식은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고들 말한다. 상사와 선배들과 함께 식사와 술 한 잔을 곁들이며 업무의 고단함을 푸는 시간이고, 직원간의 업무 단합을 위해 친목을 다지는 자리가 된다. 대부분은 법인카드로 결제를 하는 공짜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다. 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돈 굳었다며 쾌재를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직장 다니며 회식하는 날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긋한 상사분과 함께 하는 회식에서는 꼭 중간에 바람잡이를 하는 A같은 분이 한 분 계신다.

 

A : 자자, 주목~! 오늘도 다들 근무하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올 상반기 마무리 잘 했고, 남은 하반기에도 좋은 성과 있길 바라면서~ 이쯤에서 상무님의 말씀 한 번 들어야겠죠~

 

그러면 깔아놓은 멍석에 슬며시 올라서는 상무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하신 뒤에 건배제의를 하시곤 했다. 그렇게 훈훈하게 끝나면 참 좋은데... 우리 상무님은 항상 모두에게 건배제의를 시키셨다. 건배를 하기 전에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선창, 후창으로 나누어 건배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단체로 건배사를 돌아가며 할 때마다 주종은 소맥으로 고정되었다. 쟁반에 맥주잔을 인원수만큼 모아서 소주와 맥주를 현란한 손놀림으로 따른 뒤에 모두 건배 후 그 잔을 모두 비우고 잔을 리턴했다. 다음 건배가 또 있으니까 다같이 비울 때 비우지 않은 사람을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았다. 그렇게 10명이면 10번을, 20명이면 20번을 했다. 회식이 마무리 될 쯤에 항상 이런 방식으로 하니까 잘 먹고 배부른 상태에서 저렇게 연달아 소맥을 마시자니 너무 괴로웠다. 나중에는 나름의 노하우라고 했던 방법이 회식 때 그 건배 릴레이를 위해서 배를 덜 채우기도 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처음에는 배 터져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모두 한 마디씩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직책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한 사람의 말에 주목하는 시간은 그 때 뿐이니까.

 

문제는 우리 팀의 회식이 꽤 잦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팀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2~3번의 회식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건배사를 하는 것이 참 고역이었다. 임팩트 있는 한마디와 짧은 내용으로 센스를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인데, 거나하게 취해서는 그런 걸 생각할 정신이 없다. 그래서 술이 취해서는 안 된다. 아무말대잔치를 하게 되는 순간 그 분위기는 어쩔 건데? 정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그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에 가는 척 숨어있기도 했다. 술도 좀 덜 먹고 건배사 멘트도 할 게 없어서 피하고 싶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인생술집>을 보면서 다양한 건배사를 보며 생각난 이야기. 나 같이 건배사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는지 연말에 유용하게 써먹을 건배사를 알려주는 책도 보이곤 했는데, 이젠 회식이 없네. 

 

 

2018.01.20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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